에베소서 6:18-20
본문: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중보기도’와 ‘중언부언’은 다르다. 예수님은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마태복음서 6:7 그리고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 해주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기도루틴과 예수님의 기도루틴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딜(deal)을 하려고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이미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는 것이 먼저다. 우리가 그 뜻에 마음을 맞추고 순종하면, 현실에 필요한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들의 의무이기 이전에 특권이다.
그렇다면 중보기도는 무엇일까? 중보기도는 먼저 언어적으로. '中' (중). 이 한자는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保’ (보)는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중보’란 언어 그대로 ‘중간에 서서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를 계속해서 진리로 인도해 주신다. 진리를 밝혀 주신다.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의 삶속에 적용해 주시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성령님과 함께 동역하는 기도가 바로 중보기도이다. 한 사람의 구원, 가족을 넘어 사회의 큰 변혁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믿는 자들이 적극적인 중보와 함께 시작하며 완성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기도해야 하는 기도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그렇다. 중보기도는 끝까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어떤 기도의 정의를 논하고, 기도의 방법을 설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나이키사의 유명한 슬로건인 ‘Just Do It!’ 처럼 기도는 ‘‘Just Pray It!’ 기도는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모든 형식으로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끝까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부족들은 100프로 기도응답을 받는 비결이 있단다. 단순하지만 큰 인사이트를 준다. 다름아닌 아프리카 부족들은 비가 올때까지 제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들의 기도는 들으시는 대상이 있는 기도이다. 신음하는 기도에서 부터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까지. 우리는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망한 후 바벨론의 인플런서 정치인이 되었지만 그렇게 바쁜 국무일을 책임지고 처리해야 했던 다니엘이 절대로 빼놓지 않고 했던 일이 있다. 바로 나라와 민족을 향한 중보기도였다. 바로 언젠가 하나님이 회복하실 예루살렘을 상상하며 하루 세번 예루살렘을 향해 중보기도했다. 중보기도란 시간이 남고, 기분이 들때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중보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살아서 일한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기도의 사람은 신령한 능력의 사람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다. 밤에도 낮에도 기도한다. 설교 전에도 얻고 후에도 기도한다. 울창한 숲 속을 뚫고 지나가면서도 기도한다. 누추한 침상에 누워서도 기도한다. 그는 능력 있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은 능력 있게 그와 동행하신다. 이로 인하여 그는 죽어도 여전히 살아서 일한다.”
중보기도가 어떤 조건에서 타오르는가? 바로 사랑하는 만큼이다. 그 사람을 아는 만큼이다. 중보기도란 그 대상을 공감하는 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바울에게 1차적 중보기도 대상자들은 그가 눈물로 세웠던 에베소서 교회의 성도들이다. 중보기도는 관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보기도는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관심만큼 알기 원하고, 아는 만큼 기도할 수 있다. 집회에서 예언하는 목사님의 10초의 기도를 듣는 것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가 더 위대하고 강력하다.
중보기도는 그 사람의 관계안으로, 문제속으로 개입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과, 사회의 문제와 포개지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스피릿이다. 그 문제를 내 존재로 껴안는 긍휼의 마음을 소유 하는 것이다. 관계만큼 강력한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 창성이와 같은 아픔을 품고가는 부모들을 기도할 때면, 그 중보기도에 힘이 느껴진다. 공감의 범위가 넓고 깊기 때문이라 믿는다.
E.M 바운즈는 “사람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가운데 보이지 않아도 그 실체는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중보기도하는 사람과 교회가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 기도하는 한 사람이 없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서서히 메마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보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 기도하는 불씨들을 찾으신다. 그 불씨 하나가 산을 태우듯, 중보기도하는 한 사람이 선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부흥은 시작된다. 그 한 사람이 없을 때 생명의 역사는 마르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중보의 끝판왕이시다. 어떤 부분에 그런가?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 죽는 순간 까지. 마지막 호흡 앞에서도 자신을 팔고 찌르는 자들을 위해 중보하셨다.
뿐만 아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하시는 사역이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히브리서 7:2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을 치루시고 승천 하신 후에도 여전히 구원의 사역을 진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중보사역은 그분의 교회를 통해서,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여전히 사회 곳곳 마다 진행 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겨자씨 처럼 심겨저 아래로 뿌리를 내린 후에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 새싹이 나고 나무로 쑥쑥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의 정의를 내려보자. “중보기도란 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연결된 모든 관계속으로 개입하여 함께 포개져 사망의 흐름을 생명의 흐름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농부는 늘 휘파람을 불며 씨를 심지 않는다. 땅을 보며 씨를 심는다. 기도는 늘 감정이 충만한 상태가 아닌 것을 기억하라. 하지만 기도는 반드시 삶속에 열매가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도하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의 강림을 갈망했던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 공동체 가운데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현실의 두려움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며 기도했다. 이와같이 다시 오게 될 부흥은 기도의 터에서 분수처럼 분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메마른 켈리포니아 엘레이에서도 다시한번 부흥은 일어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의 손이 되어 아픔속에 있는 사람과 마음과 마음을 눈과 눈을, 손과 손을 포개어 기도해자. 세상을 위해서 중언부언을 넘어 중보기도하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깨어서 끝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함께 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그 사람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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