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이성과 논리체계안에서 신의 존재와 신으로 비롯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시대적 상황안에서 한 개인의 경험도 포함된다. 신학은 사람이 정립한 것이므로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고해서 이성의 가치를 스스로 내릴 필요 없다. 각 사람마다 나름의 신학이 있다. 양극단은 무엇이든 해롭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건강한 교리의 도움을 받아 삶을 세워야 한다.
Theology is a way of understanding God and the world He made, using the thinking and logic. Theology is made by people, so it's not perfect. But that doesn't mean we should devalue our ability to think.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16-22
19절. 성령은 소멸 될 수 있는가? Can the holy spirit be extingished? 성령이 꺼진 상태이다. 이 문제는 구원은 취소 될 수 있는가? 와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성령의 역사이고, 구원얻은 성도들에게 성령님은 내주하시며, 진리로 인도하시고, 성화를 넘어 영화로운 자리로 인도하신다.
그런데 이에 대한 칼빈주의자들과 알마니안주의자들의 신학적인 팽팽한 대립이 있다. 이 둘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 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만. 구원의 확신, 구원 이후에 대한 삶의 방향성에 신학이 선명해 질수록 이 둘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게된다. (나는 어느 한쪽의 신학을 옹호하거나, 다른 한쪽으로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Throughout the history, until today, there is an intense theological debate between Calvinists and Arminians regarding this issue. ‘The theology of predestination vs. theology of the free-will.’ Both believe salvation comes from grace, but when it comes to the assurance of salvation and a life after the salvation, they are different.
우선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은 취소되거나, 성령은 소멸할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창조전 부터,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특정한 개인들을 택하셨고 또 그렇게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영생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에게 한번 주어진 구원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실수에 따라 취소 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4-5
이 시점에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신학이 정립된다.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령은 성도들의 실수와 약함에도 끝까지 최후의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교리다. 그 과정 가운데 성령은 인격적이시셔서 성도들을 가르치시고, 도우시고, 은사를 주시고, 책망(rebukes)도하시고, 근심(greives)도 하신다.
이 교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말씀들은 성경에 수두룩하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복음서 10:28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9
그래서 가롯유다와 같은 자들은 이미 창조 전부터 예정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People like Judas Iscariot are those who were predestined not to receive the salvation.
반면 알마니안 계통의 신학은 구원이 취소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배교에 대한 경고에 대해 주장한다. 사울왕의 타락, 가롯유다의 배교, 베드로의 부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미혹받은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셨다. On the other hand, the Arminianeous theology argues from the Bible about warnings given to the saints regarding apostasy. The fall of King Saul, the betrayal of Judas Iscariot. Jesus also warned His disciples about the dangers of being deceived."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24:9-13
구원을 잃게 될 가능성이 없다면 왜 경고를 주셨을까? 심지어 빌립보서 2:12절에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립보서 2:12
그리고 이들은 칼빈니즘이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개념과 모순이 된다는 것을 든다.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면 사람들은 배교를 선택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If the salvation can’t be cancelled, it means that people have no free will.
이 양쪽 모두 성경을 두고 말하고 있기에 긴장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성령은 소멸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은 인생의 운명, 영원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 않는가? 만약 알마니안 신학 처럼 우리의 실수와 무감각함으로 구원에서 탈락되면 어떨할까?
두 양극단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보자. Let’s compare pros and cons of each doctrines. 칼비니즘의 장점은 신자들이 그들의 구원은 영원하다는 확신 속에 안도감을 갖고 살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에 따라 취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점도 크다. 성도의 견인 교리가 양산할 수 있는 불량품 신자들이다. 이들은 구원을 천국 티켓으로 생각하게 된다. 구원을 얻었기에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막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Sadly, there are the defective believers that the doctrine of perseverance of the saints can produce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체점검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바로 회심이다. 진심으로 회심했느냐의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For such people, we must do a self-examine? The question of whether one has truly repented is extremely important.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신앙의 온도를 살펴야 한다. 신앙의 온도는 뜨거울 때고 있고 식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늘 신앙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종교 생활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시동걸리지 않은 차에 안전밸트를 차고 있는 운전수와 같다.
반대로 인간의 선택을 중요시 여기는 알마니안 신학의 장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선택을 통한 성화에 있다. On the other hand, the strong side of the armenian thoelogy is the santification.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령의 충만에 대해 민감해진다.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불량품도 있다. 구원이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취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두려움이 생긴다. Because there's a possibility that salvation can be cancelled based on their own decisions, it brings fear. 잘못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 다시 율법주의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돌아오기를 원하시지만, 그 뜻을 계속 해서 저버리는 경우 성령은 근심을 하시다가 어느 순간에는 소멸한다. 성령의 불이 꺼진다. 신앙이 서서히 식는다. 죄를 저도 양심의 가책을 못느낀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미지근한 신앙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회개를 촉구해도 들리지 않는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4-6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령이 한번 떠나면 성도들은 다시 거듭나지 못하게 된다. 가롯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이 회개할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예수님은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우리가 그 기회를 저버렸기 때문에,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당신은 칼비니즘의 예정론 신학이 좋은가? 알마니우스의 자유의지가 좋은가? 이 둘 중에 어떤 신학의 세계관으로 설정하고 가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어느쪽이든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느 쪽인 우리는 오늘 우리가 성령충만한가의 질문앞에 답하면 된다. Today, we simply need to answer the question: Are w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짬뽕신학을 들어봤는가? 안탑갑게도 우리 청년들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 저기서 들어왔던 신학이 짬뽕이 되어서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신앙을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애매모호하다. 짬뽕신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당신은 신학계를 강타할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장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는 두 신학을 자기가 좋아하는대로 혼합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내게 좋은 것만 떼어 내것으로 만든 것 같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 신중하지 않고, 삶에 대해서도 태만하다.
하지만 예정론이든 자유의지론이든 구원, 예수의 제자된 삶, 성령충만의 삶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저야만한다. 구원의 확신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서로 뗄래야 뗄수가 없는 짝이다.
나는 감리교, 장로교 두가지 뿌리를 갖다. 내 고조 할아버지는 한국 강화도 교동에 감리교 출신 선교사 젠슨(Jensen)목사와 함께 최초 교회를 세우신 분중 한분이시다. 그리고 내 아버님은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장로교 합동측 소속 목사로 40년 동안 목회를 하셨다. 어쩔수 없이 나와 우리 교회는 감리교의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칼빈니즘, 개혁주의적 신학이 강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며, 한번 받은 구원은 취소 될 수 없으며, 성령의 견인으로 하여금 계속되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믿는다. 성령의 권면도 책망도 징계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 시키시려는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순종한다.
이 신학의 프레임은 자연적으로 나와 우리 교회의 목회철학에 나타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첫째, 회심의 확인이 필요하다. 3B(belief, behavior, belonging) 둘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과 권면을 수용하낟. 만약 내 자식이 잘 못된 길로 향한다면 태만하게 지켜볼 부모는 한명 도 없다. In faith, we believe that even the hard times help us to grow closer to God. The Holy Spirit helps, corrects, and guides us to be more like Jesus.
이럴 때 오늘 말씀인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협박이 아니라 강력한 권면이다. 성령은 소멸하신다. 성령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침묵하는 상태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둔해지는 상태다. 기쁨과 활력이 없는 상태다. 찬양을 해도 감동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 말씀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김주송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삶을 살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중이다. 우리에게는 신학으로 해석하지만 바울에게는 그저 신앙이였다. 신학은 신앙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막7:7)
바울은 성령의 뜻을 구하고, 성령과 동행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우리가 성령을 더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삶을 더욱 소유한다는 것이다. Surrender
우리에게는 짬뽕신학이 아니라 하이브리드 신학이 필요하다. 이 때 기도는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을 연결하는 끈이되어 준다. 원초적인 의미, 본질적인 기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결정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해 주신 자유의지 가운데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평생토록 내 삶속에 기도의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도들의 참된 기도는 구원의 확신으로 향하게 하며, 영원과의 입맞춤이며, 삶의 호흡이며, 말씀을 태우는 불이며, 죄와 싸우는 힘이며, 운명을 향해 가는 무릎이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연결해보자. “Can but Will not!” 우리는 타락할 가능성이 있지만(자유의지), 또한 우리는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예정론).” 왜?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도를 자리를 지킬 자들이기에.
우리 가운데 어느순간 신앙의 온도가 내려가고, 바쁨과 타협하고, 예배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헌신의 덫에 빠진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신다. 성령은 기도로 이끄실 것이다. 말씀과 기도에 기름을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상한갈대를 꺽지 않으신다. 꺼저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12:20
“He will not crush the weakest reed or put out a flickering candle. Finally he will cause justice to be victorious.” Matthew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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